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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화영 - 타인을 만족시켜야만 존재 가치를 느끼는 불행
가을 ・ 2021. 10. 17.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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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비행 청소년들이 마주하는 환경에 충격을 받았다는 평이 많은데, 나는 박화영이라는 한 인물에 대해 고찰하고 공감하는 바가 더 컸다. 주변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까지 리얼하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에 대한 과장도 없이 연출과 연기 모두 완벽했다. 정말 잘 만든 독립 영화이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와서 크게 뜬 배우 '이유미'가 이 영화에도 꽤 임팩트 있게 나온다. 오징어 게임에서와 비슷한 캐릭터로, 약간 얼빵한데 귀여운 "세진"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비중이 크기 않았던 세진(이유미)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가 박화영의 후속작으로 만들어졌다. 배우 이유미를 파고 싶다면 "박화영"과 "어른들은 몰라요"를 연이어 보며 정주행 해볼 것을 추천한다.
얼핏 보면 박화영은 친구들에게 욕을 툭툭 던지고 핀잔도 주며 존재감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욕을 하며 센 척하고 웃다가도 친구들이 정색하면 눈치를 본다. 친구들의 무리한 부탁에도 마지못한 척 욕을 하며 다 들어준다.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지 않게 넘기려는 모습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노력 같아 보였다. 하지만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상처 받은 표정에서 애써 숨기려 하는 속마음이 엿보인다. 이내 곧 다시 억지웃음을 짓는다.
친구들은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데도, 박화영은 그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혼자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떠나갈까 두려워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엄마"가 되는 것. 그녀 자취방을 오가는 친구들은 박화영을 "엄마"라 부른다. 박화영이 이 아이들에게 밥부터 설거지, 빨래까지 다 해주며 엄마 역할을 자처한다.
엄마라는 존재는 자식들에게 희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친구 관계는 그렇지가 않다. 친구들은 그녀를 엄마처럼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엄마가 해주는 역할을 부탁한다. 속으로는 박화영을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아양을 떨며 교묘하게 그녀를 이용한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은미정"은 특히 남자친구 영재와의 신경전에 그녀를 이용한다. 박화영이 영재에게 심하게 맞은 날 미정이 크게 분노한다. 당연히 박화영이 맞은 것에 대해 영재에게 화를 내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에게 화영은 당연히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영재가 친구들 앞에서 본인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은 것에 분노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박화영은 또 한 번 상처받은 표정을 비춘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헌신하지만 친구는 박화영이 심하게 다친 것보다 본인을 더 생각하고 있는 것에 나 또한 슬퍼졌다.
친구 관계가 한참 중요할 시기, 이렇게 대등하지 못한 관계가 형성되곤 했던 10대들의 우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이 시기에 이러한 유형의 아이들 사이에서는 더 매정할수록 더 인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하게 사악하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관계의 결말은 참 허무하고 의미 없게 끝이 난다. (관련 내용 뒤에 계속)
비행 청소년, 어른들과의 관계
박화영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당당하게 구는 순간이 있다. 바로 어른들을 대할 때이다. 학교 교무실에 찾아와서 선생님께 난동을 부린다. 엄마께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돈을 달라고 욕을 한다. 돈을 주지 않겠다는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심한 욕을 해가며 끝까지 돈을 뜯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뜯어낸 돈으로 친구들에게 담배나 먹을 것을 사주곤 한다.
박화영이 이렇게 선생님, 경찰, 엄마 등의 어른들에게만 막무가내로 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일반적으로 어른들은 애들과 달리 적정선을 지키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애들이 아무리 심한 행동을 해도 어느 정도 이해하며,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래 친구들 앞에서 영웅이 되고 싶은 심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런 그녀의 행동을 멋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뒤에서 비웃기만 한다.
물론 세상엔 경찰, 선생님, 엄마의 역할을 하는 모범적인 어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장면들이 실제로 쉽게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필요한 비행 청소년들이 범죄에 어떤 식으로 노출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탈은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성범죄나 임신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픈 관계의 결말
은미정은 친구(?) 박화영이나 남자친구 영재를 은근히 조종하며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 일진 우두머리인 영재와의 교제를 이어가고, 영재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박화영을 내세워 영재의 화풀이를 대신하게 한다. 또 박화영을 미끼로 이용해 영재와의 불화를 해결한다. 그 대가로 화영은 영재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한다.
(강력한 스포주의!)
결정적으로 미정의 무모한 꾀로 인해 애꿎은 박화영이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범죄 누명까지 대신 쓰게 된다. (이 부분이 정말 충격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가 끔찍하고 기분이 더럽다고 평가를 한다.) 박화영이 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미정과 영재는 분노에 차 가해자를 폭행한다. 특히 미정이는 뭐에 씐 듯 화가 나 남자를 내려치는데 그 이유가 본인에게 나쁜 짓을 시도한 남자에게 화가 났기 때문인지, 친구가 나쁜 일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인지, 본인 때문에 화영이 그런 일을 당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연예인 준비생인 미정의 미래를 대신해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한 박화영에게 그녀는 얼마나 고마워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정에게 그 사건과 그녀의 모든 추억은 지우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몇 년 후 다시 만난 미정은 화영이 조심스럽게 꺼낸 과거 얘기에 "엄마? 무슨 소리? 우리 엄마? 집에 잘 있지"라며 외면을 한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
못된 짓을 하고도 성공한 연예인이 된 그녀와 구렁텅이 인생에 빠진 박화영이 대비되어 마음이 아프다. 아무것도 따지지 못하고 여전히 미정이 좋아 배시시 웃고만 있는 박화영이 불쌍했다. 좋은 인연을 구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사람에게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가를 보여준다.
박화영,
그녀의 불안정한 삶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박화영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가엽지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엄마에게 함부로 욕을 하는 장면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엄마에게 끝도 모르고 욕하고 소리를 지르며 돈을 뜯어내는 게 너무 괘씸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이해 안 갔던 모든 행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괜히 어긋나는 게 아니다.
"엄마도 엄마 같은 엄마 만났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얼마나 사무치는 말일까? 그녀에겐 애정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충분한 보호와 애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만족시켜야만 존재 가치를 느끼는 불행. 그 불행의 근원은 가정이었지만 성인이 된 그녀가 이제는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아낄 수 있게 되기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다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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